“택시가 안오네, 119나 부를까”…’철면피’ 넘쳐나는 대한민국

“더워서” “변이 안나와”…
“아이고 죽네”…병원가면 “다 나았다”
거절하면 ‘표적 민원’으로 보복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지난달 29일 오전 2시 20분쯤 119에 이런 신고가 들어왔다. 발신지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 상황실에서 CPR(심폐소생술) 출동지령이 떨어졌다. 구로소방서 독산 119안전센터에서 두 대의 구급차가 소방관 6명을 태우고 동시에 출동했다.
이들이 현장에서 만난 건, 심정지 환자가 아니라 외출복을 갖춰입은 60대 여성이었다. “갈 데가 있는데….새벽이라 택시가 안 잡히네. 구급차 타고 거기로 좀 갑시다.”

지난 6월 충남 아산소방서에는 “화장실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대변이 안 나온다”는 119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지는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깊은 산골.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지만 신고자 방모(59)씨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아산소방서 소속 홍모(46) 소방장은 신고자를 구급차에 태우고 20여 분 떨어진 시내 병원으로 이송했다. 홍 소방장은 “한 달에 한두 건 정도는 시내에 편하게 가려고 119 신고하는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씨 속에 119 구급차를 ‘콜택시’처럼 악용하는 악성 신고자가 늘고 있다. “아프다”고 119에 신고한 뒤, 구급차가 출동하면 “OO동 갑시다”며 목적지를 부르는 식이다. “꾀병 부리다가도 구급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씻은 듯 나았답니다. 119가 콜택시 번호 입니까.” 서울지역 소방관 이모(34)씨 얘기다.

◇벌교→광주 60km, 구급차를 ‘시외 콜택시’로 썼다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해 4만 8137명의 ‘비(非)응급 환자’가 119에 신고했다. 위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공짜’라는 이유로 구급차를 부른 것이다.

일선 소방관들은 “허탕 출동하는 것도 힘 빠지지만, 그사이 다른 응급환자들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현재 전국 1029개 안전센터에서 운행하는 구급차는 1384대. 안전센터 한 곳당 구급차 한 대를 운영하는 셈.

문제는 구급차가 누군가의 ‘콜택시’ 노릇을 하는 동안, 응급현장에 출동할 여분의 차량이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원거리 구급차가 원정출동에 나서야 한다. 응급환자들의 ‘골든타임’을 놓칠 우려가 있다. 이런 일은 더위가 찾아오는 여름철마다 반복되고 있다.

“배가 너무 아파요. 빨리 좀 와주세요.” 지난해 7월 전남 보성소방서에 다급한 목소리로 119 신고가 들어왔다. 구급차를 부른 것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거주하는 김모(58)씨였다. 가장 가까운 벌교 119안전센터에서 하나밖에 없는 구급차가 출동했다. 김씨는 구급차에 탑승하더니 한사코 “전남대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전남대병원은 벌교에서 60km 떨어졌다. 1시간 이상을 내달려 김씨를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데려다줬다. 병원에 도착한 김씨는 “이제 배가 아프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니 시내로 사라졌다. 시외(市外)에 나가기 위해 ‘119’를 ‘콜택시’처럼 이용한 것이다.

대구소방청 소속 폭염 구급대원들은 이런 악성 신고자들을 ‘단골손님’이라고 부른다. 119를 단골처럼 찾는다는 뜻이다. 무더위 속에서 택시 잡기 귀찮을 때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에 타고 귀가하는 ‘단골손님’도 있다고 한다.

◇“대중교통 타시라”하면 표적 민원으로 ‘보복’

지난 4월 소방청은 비응급 출동을 줄이기 위한 ‘출동 거절 기준안’을 시행했다. 신고 상황을 긴급, 잠재 긴급, 비긴급 세 가지로 나눈 것. 비긴급 출동의 경우에는 소방관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 ‘비둘기 포획’이나 ‘현관문 열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방관들은 여전히 ‘비긴급’ 신고에 출동하는 형편이다. 서울 지역의 소방서 상황실 관계자는 “출동할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타일러도, 생떼를 쓴다”며 “막무가내로 ‘나 지금 죽는다’면 어쩔 수 없이 출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절할 경우 되돌아오는 ‘보복 민원’도 소방관들을 위축시킨다.
지난 3월 대구소방청 소속 소방관 이모(30)씨는 악성 신고자에게 “구급차 말고 대중교통을 타시라”고 말했다. 기분이 상한 악성 신고자가 보건복지부·대구시청 등에 “소방관 이씨가 불친절하다”는 민원을 쏟아냈다. 동시에 그는 일주일 내내 “아프다”며 119 출동을 요구했다. 이후 신고자는 ‘개선장군’처럼 구급차를 타고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했다.

◇돈을 물려야 하나, 처벌해야 하나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관이 현장에서 시민들과 싸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미국과 프랑스처럼 비응급 환자의 구급차 탑승을 제도적으로 전면 유료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119 악성 신고자를 엄벌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솜방망이 처벌’이 남아있는 한, 이들의 ‘119 콜택시 신고’가 여전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2015년 “구급차를 태워달라”고 반복적으로 119신고를 했던 A씨는 ‘50만원’ 과태료 처분만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도끼로 손목을 자해했다”며 또 거짓신고로 소방관들을 골탕 먹였다.

경찰 관계자는 “과태료 한 번 내는 것이 택시비보다 싸게 먹힌다고 생각하는 악성 신고자들은 반복해서 같은 일을 저지를 것”이라면서 “119 출동체계를 위협하는 행위에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를 적용해 적극적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8-08-02T13:29:4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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